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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제 사라마구, 눈먼자들의 도시


    Category : 글 꾸러미/책을 읽은 후, 생각들  /  Posted at : 2009/11/23 17:37

     영화로 개봉 이후 줄곧 책방에 들어갈 때마다 베스트셀러 라인에서 보이는 이 책이 그렇게나 읽고 싶었었다. 하지만 집에 쌓여있는 많은 책들과 많은 공부거리들에 눌려 선뜻 손을 못내밀었다. 그러다 며칠 전 교보문고 인터넷 서점에서 30%할인이라는 말에 선뜻 결제하고 있는 내 모습…(사실 난 현재 쇼핑 중독증세가 좀 있다.)


     배송이 오자마자 시험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눈먼자들의 도시를 마구 읽어대기 시작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끌리는 치밀한 심리묘사. 최근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을 읽고 있는데 그와 거의 방불할 정도의 치밀한 성격묘사를 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정치적 소설로써 읽어내고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 사실 주제 사라마구가 그렇게 의도하고 썼다기 보다는 인간의 내면심리를 관찰해볼때 어쩔수없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결국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저그럴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성이 보인다.


    책을 읽는 내내 두려움에 떨었다. 누군가 날 관찰하고 있을 것 같은 불안함, 감시당하고 조종당하고, 이용당하는 것 같은 불편함이 나에게 있는 시간이었다. 과연 그것들이 어떠한 감정상태에서 발현된 것일까.  


    의사의 아내 세상을 상당히 두렵게 바라본다. 그 두려움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이는 어떠한 악한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인간 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담겨있는 것 같다.  그의 남편조차도 눈이 멀어버렸을 때 외도를 행한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눈이 먼 우리는 그러한 잘잘못을 구분할 능력을 잃는다. 밝음과 어두움을 구별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이 눈이 멀어버린 세상은 그야말로 악의 천국이다. 모든 사람들이 악만을 행하고 더럽고 음탕하다. 하지만 그들의 눈엔 하얀 세상만이 보일 뿐이다. 모든 것이 선해 보이는 세상. 아무리 더러운 오물을 밟아도 그저 쓱 한번 닦아내고 가버리는 것이다.


     인간은 눈을 가렸을 때 비로소 그 내면의 참 모습을 보일 것 같다.  음지의 모습이 양지로 나와버리는 것이다. 주제 사라마구는 바로 이 작업을 행했다. 음지의 모든 행동들을 양지로 끌어내어 그들이 안보이는 빛을 쐬어주고 그 현상을 관찰한다. 그들을 서로 죽이고 약탈하고 권력을 탐하고 먹을 것에 집중한다. 그들에게 양심이나 가치따윈 없다.  그저 그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우리의 숨겨진 이면에 감추어진 본 모습인 것이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이러한 더러움과 악함이 있는 우리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주제 사라마구는 희망을 제시한다. 마지막에 모두가 눈을 뜨게 된다. 그 눈을 뜨는 장면은 진실한 사랑이 등장하고 양보와 타협이 나타난, 그리고 우리의 몸을 깨끗이 정화한 후에 일어난다.  우리가 알았던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몸을 흔들어대던 동작들이 아니고 겉모습, 나이가 아닌 그 사람에 대한 신뢰와 그 내면에 대한 존중이 있는 진정한 사랑이 창녀에게 찾아왔다.  항상 불만을 가져오고 신뢰를 보내지 못했던 맨 처음 눈이 멀어버린 남자는 맨 마지막에 가서야 의사에게 조금의 신뢰를 보낸다. 이 모든 것들이 그들을 변화를 보여준다.


     의사의 아내는 왜 눈이 멀지 않았을까? 그녀는 그 남편을 진실되게 사랑했고 충분한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어 보인다.  


     한가지 재미있는 생각을 한 것이 있는데 왜 이 소설에 감정표나 문장나눔이 없을까? 사람들은 집중력을 이끌어내는 도구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그런 것 같다. 피곤할 정도로 집중해야 그게 누구의 말인지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주제 사라마구는 그것 외에 그것이 눈먼 후의 목소리만으로 사람을 구분하고 파악해야하는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상황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소설 속에 등장하는 처음으로 눈이 먼 남자의 집에 살고 있던 눈이 안보임에도 기록을 하고 있는 그 작가의 글쓰기 방식이 바로 이 소설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눈이 멀어있는 상태에서 줄을 바꾼다는것은 어디서 쓰고있는 라인을 놓칠지 모르는 상황이기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 소설을 본 것이 탁월했던 것 같다. 그리고 영화의 긴장감과 책의 긴장감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책이 훌륭하다. 물론 주제 사라마구의 치밀한 묘사에서 이러한 모든 것들이 함께한 것들일 것이다. 노벨 문학상을 받을만한 작가였던 것 같다. 앞으로도 그의 많은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

    Posted By Yang

    솔로비요프, '악에 관한 세편의 대화' 중 '적그리스도에 관한 짧은 소설'


    Category : 글 꾸러미/책을 읽은 후, 생각들  /  Posted at : 2009/11/23 17:35
    지난 학기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라는 러시아어문학부 수업을 들었다. 핵심교양이라 들어야 했는데 개인적으로 한창 소설을 읽고 싶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만족했던 수업이었다. 내가 그 수업을 통해 보고 싶었던 것은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종교관, 그리고 포괄적인 러시아 정교의 신앙관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관심은 러시아어문학부에서 교양과정생 및 러시아입문3을 듣는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러시아탐방'을 가서도 계속되었다.
     그 수업의 지도교수님이셨고  '러시아탐방'을 이끌고 가신 교수님은 '솔로비요프'라는 작가에 대해 연구를 하셨는데 얼마전 직접 번역을 하셨다고 책을 건내 주셨다. 저자 사인이 있는데다 나에대한 큰 관심을 보여주신 선생님의 책을 받았을 대 그 기분은 정말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책의 디자인 또한 이뻐서 얼른 읽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 때 한창 앙드레 지드의 소설들을 읽으며 분석하며 놀라고 있던 때였고 영어 시험에 바빴고, 대학원 입시 때문에 정신이 없던 때라 지금까지 미루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는 일들이 많아서 이러다간 절대 읽지 못하겠단 생각에 이 소설의 가장 클라이막스라고 생각되는-나의 생각인데 앞부분을 읽으면서는 지쳤는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흥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부분을 오늘, 읽었다.

     '적그리스도에 관한 짧은 소설'에서 내가 집중적으로 관심을 가졌던 부분은 '종교적 통합'의 모습이다. 이 소설 속에는 두 개의 종교적 통합이 존재한다. 적그리스도에 의한 통합과 세상의 마지막에 탄압을 받으면서 러시아정교, 카톨릭, 개신교의 통합이 그것이다. 적그리스도가 통치 4년 째 되는 해에-성경에선 3년6개월로 되어있으므로 4년 째 되는 해가 마지막 통치로 놓은 것 같다-모든 것을 통합하고 마지막으로 종교의 통합을 하기 위해 이미 거의 사멸해가는 각 종교들의 수장들을 이스라엘, 자신의 궁으로 모은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그들을 '로마 황제의 옥좌의 복원', '신성한 정교교회의 전통을 복원하기 위한 위원회', '자유로운 성서연구와 자신의 신학박사학위'를 이용해 대다수의 종교지도자들을 자신의 지배로 넘어오게 만든다.  하지만 소수의 신실한 카톨릭, 정교회, 기독교 신자들이 남게 되고 그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작은 모임으로 뭉쳐진다.
     이 대결에서 결국 전 기독교는 어떻게든 통합되고 하나의 주제, 적그리스도-그리스도의 대결 구도로 재편된다. 그런데 여기서 두 통합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사상적으로 모든 지식을 합치는 방향으로의 통합이고 하나는 단 하나의 명제만을 남겨놓는 통합이다. 사실, 과학적이고 학문적인 통합은 전자의 통합이 그럴 듯해보이지만 솔로비요프의 의도와, 내 생각이 그렇듯 후자가 더 기독교적이다. 적그리스도의 사상적으로 모든 지식을 합치는 방향으로의 통합은 모양은 그럴 듯해 보이나 그 안에 그리스도를 품을 수 있는가의 문제에 직면한다. 이는 다원주의와 연결된다. 다원주의에서도 그리스도를 인정한다. 하지만 성경의 전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닌, 일부분, '그리스도는 위대한 철학자'라는 부분만을 가져간다. 그리고 하나님이란 존재에 대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닌 '전 우주에 베어있는 어떠한 기운'같은 모습으로 -오히려 더 크게, 그리고 포괄적으로-정의한다. 이러한 정의는 오히려 더 기독교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신의 영역을 유한하게 한정하는 우리의 생각에 무한이라는 개념을 다시한번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함께 신을 친구와 같은 옆에 있는 듯한 인격체에서 완벽한 무인격체로써 우리와는 떨어져있는 그 무엇으로 오히려 한정되는 모습도 보인다. 게다가 그리스도에 대한 철학자의 지위 부여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흔든다. 사실, 이것에 대해서 논리적 반박이 가능하진 않다. 기독교에서는 이에 대해서 어떠한 증거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이러한 것들에 대한 증거는 사라진지 오래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의지해야하는건 논리적이지 않은 어떠한 '믿음'외엔 없다. (여기에서 몇가지 증거라고 할만한 것을 말할 수도 있으나 이는 독자에게 반박을 받을 만큼 조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유태인의 이스라엘 건설이라든지 등등의 것)
     '그리스도'라는 단 하나의 명제만을 남겨놓는 통합은, 언제가 될지 모르는 종말의 때에 타당한 모습이 될 것 같다. 현재의 기독교의 분화는 다양한 이론적 분화이다. 하지만 그 안에 충분히 강력하게 '그리스도'라는 본질이 흐르고 있다. (이렇다고 종교통합론자로 바라보지 말라. 현재의 그러한 통합은 긍정적 통합이 아닌 부정적 통합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러시아정교나, 카톨릭이나, 기독교나... 얼마나 많은 외부요소와 결합되어있는가의 문제가 있겠지만 그 안엔 분명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숨어있다.
     러시아 정교(혹은 개신교가 아닌 타 기독교)가 얼마나 하나님께 신실한가의 문제는 처음으로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수업을 접하면서 가졌던 질문이었고 이에 대한 결론은 위와 같았다. 가끔 기독교인들 중에 카톨릭 사람들을 밑도끝도 없이 비난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나도 물론 그리스도의 본질에 개신교가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안에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음을 인정해야한다. 이는 학문적으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식의 통합이 아니라 같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써의 동질감, 통합이어야 할 것이다.


    덧,
    하나 사족으로 더 말하고 싶은 건 솔로비요프는 소설에서 타 종교-불교, 이슬람교 등-의 적그리스도의 사상과의 통합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이슬람교의 경우에는 모르겠으나 불교의 경우 그러한 솔로비요프의 생각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교는 통합적 측면이 상당히 강하다. 화계사-한신대의 교류만 보아도 한신대는 엄청난 기독교 내부 비판에 부딪히는 반면 화계사는 그러한 것 없이 긍정적인 시선을 받는다. 이러한 도덕적 모습에선 기독교 보다 낫다고 할 수도 있겠다.(기독교는 십계명에 써 있듯이 절대 본질적으로 이러한 통합주의를 지향할 수 없다.)
    Posted By Y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