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여유있는 지금, 2009년 11월 21일, 토요일, 베르디의 운명의 힘을 볼 수 있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서울시 오페라단의 작품이 올려졌다. 전혀 사전지식없이 감상했다. 세종문화회관에서의 오페라 감상도 처음이었고, 오페라는 이번 것까지 합쳐 4번을 본 것 같다.

운명의 힘은 비극이었다. 운명이 추동해 나가는 돈 알바로와 레오노라의 삶은 끊임없이 절망으로 빠져들어간다. 사랑한 후 오발로 아버지를 죽이고, 헤어지고, 수도원으로 도망하고 마지막 재회에도 결국 레오노라의 죽음으로 이르는 비극.
그런데 이러한 운명이 추동하는 힘을 레오노라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다. 신은 공평하다는 것을 죽을 때에도 이야기한다. 과연 신이 공평했는가란 질문을 베르디는 던지고 있는 것일까. 베르디는 그의 아내, 두 자녀를 동시에 잃었다고 했다. 그 슬픔을 그는 작품으로 쓰는데 이러한 그의 절망들이 이 작품에 기록되어있는 것 같다.
레오노라의 신은 공평하다는 논리는 어떻게 가져올 수 있는 것일까? 그들에겐 시작부터 끝까지 절망으로 이끄는 운명의 사랑이었다. 그것이 공평할까. 사실, 이 질문은 내가 많은 고민을 했고 항상 반발했던 한 질문과 같은 것 같다.
"백만송이 장미를 선물한 짝사랑하는 나무꾼의 삶은 아름다운가."
백만송이 장미 곡의 이야기의 주인공은 짝사랑하는 사람이 결혼하는 것을 알고 그의 집을팔아(?) 백만송이 장미를 그녀에게 선물한다. 그리고 그는 그 여자를 그리며 그의 죽는 날까지 살아나간다. 이에 대해 잘 아는 교수님께선 '그러한 사랑을 그의 삶에 있어서 한 번 해 보았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있는가?'라고 답하셨다. 이에 대해서 난 '한번의 아름다운 고백뒤에 남겨지는 수많은 아픔과 슬픔을 볼 때 그것이 실제로 아름다운 것인가?'라고 반문이 들었다. 백만송이 장미를 선물한 나무꾼과 돈 알바로, 레오노라의 모습은 닮아있다. 그리고 레오노라의 시선은 교수님의 시선과, 돈 알바로의 시선은 나의 주장과 닮아있다.
사실, 어느정도 난 교수님의 답변에 수긍했다. 추억을 가지고 살아나가나는 것이... 고통이 존재하지만 우리 삶의 본질이고, 우리가 받아들여야할, 그리고 어쩔수없이 펼쳐져있는 현실이다. 나무꾼에게 그 사랑은 무엇보다도 위대하고 그에게 크나큰 기쁨을 가져다 준 것일 것이다. (이 논리는 교수님의 논리를 완벽히 수긍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하지만 나의 돈 알바로의 시선은 버릴 순 없다. 그러한 사랑은 안하느니만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신은 공평한가. 신은 공평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신앙인으로써 그것을 의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이기에 눈에 보이는 것에 끊임없이 불만을 가지고 투정을 부린다. 어떠한 신앙인이든, 그것은 인간의 한계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신 앞에 100세에 얻은 아들을 내어놓는 아브라함의 자세가 바로, 그러한 신의 공평성을 확실히 인정하는 자세일 것이다. 이것이 레오노라의 태도이고 그들의 사랑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고, 그럴 수밖에(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운명에 순응하는 것. 그것은 신을 인정하는 것이고 진정한 구원, 영혼의 평안을 얻는 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신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베르디는 아마 이 '운명의 힘'을 통해 '신은 공평하다. 운명에 순응하라'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다.
추신1, 사실, 오페라에 대해선 생각보다 실망이 되었다. 러시아에서 보았던 카르멘의 합창의 묘미 등이 잘 드러나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3시 것이 더 연기는 좋았다고 어느 분이 평을 올려주셨다. 내가 본 7시 반 공연이 성악적인 측면에선 훨씬 더 뛰어났다고 한다.
추신2, 가장 큰 박수를 받은 건 프레찌오실라 역을 한 분이였는데 프레찌오질라를 보면 스타일이 집시였기에 카르멘을 보는 듯 했다. 암울한 내용과 대비되게 밝은 색상을 넣은 듯 싶다.
Posted By Yang
